예전까지는 그렇게 산을 오르락내리락했어도 지친 기색한 번 보이지 않았는데, 그즈음에는 숨이 가쁘고 땀도 비 오듯이 흘려 대서 수건 하나가 쥐어짜면 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흠뻑 젖는 일이 예사였다.
“술 좀 줄여야지”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그 나이에도 1년이면 3백 일 이상을 접대다 뭐다 해서 술자리에서 살았으니 몸도 견뎌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싶었다. 주량도 줄고 일찍 취하는데다가 예전에는 없었던 소위 필름이 끊기는 일도 생기고 아침까지도 술이 안 깨는 경우가 많았다. 또 술만 마시면 온몸이 불긋불긋해지고 가렵기도 해서 나이 탓이려니 했던 것이다.
“병원에 한 번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봐. 내가 잘 아는 의사를 소개해줄 테니까”
산에 같이 오르던 친구가 내가 전에 없이 힘들어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딱해 보였는지 지금은 삼성강북병원이 된 고려병원의 아는 의사를 소개해주었다.
술이 약해지고 땀만 흘리는 것으로 그쳤으면 “좀 쉬면 나아지겠지”하고 마다했을 텐데, 소화도 잘 안 되어서 속이 늘 더부룩했기에 그 친구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나 스스로는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편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병원에 가리를 꺼린다. 겉으로야 건강만큼은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지만 사실 술 때문에 속이 다 망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지레 짐작에 병원 소리만 나와도 끄떡없다고 맞받아치는 것이다. 행여라도 암이라는 판정을 받을까봐, 그래서 그 좋아하는 술을 다시는 마시지 못할까봐.그런데 그런 사람이 병원을 제 발고 찾아갈 생각을 했을 정도라면 스스로 생가해도 증상이 너무 심하거나 통증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때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늦었다는 판정을 받는 게 대부분이다. 내가 꼭 그랬다.
91년 7월, 친구가 소개해준 고려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2~3일 뒤에 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에 나갔는데 의사는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뜻밖의 말을 건넸다.
“확실한 것은 더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간경화라고 생각됩니다. 입원해서 검사를 받으시지요.” 위암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간경화라니? 예상을 빗 나간게 이상하긴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음, 그것도 술과 관련이 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큰 병에 걸린 줄은 알아채지 못했다. 간경화라는 병도 다른 가벼운 병처럼 치료를 하면 쉽게 낫는 그럼 것으로 생각했다.
88년인가 89년이던가, 간염이 한창 유행이던 때에 회사에서 단체로 간염 검사를 받았는데 그때 B형 간염 보균자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맞는 예방주사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수시로 검사를 해서 변화 여부를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간염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또 다른 무서운 질병으로 변하는지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회사에서 간염 검사를 받은 얼마 뒤에는 기침이 잦고 기관지가 아파서 서울대병원에서 위와 기관지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역시 위와 기관지는 멀쩡하고 대신 걱정할 만큼은 아니지만 간염 기운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리를 또다시 들었는데도 무심결에 넘겨버렸다. 걱정할 만큼은 아니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여전히 일에 매달려 살았고 술자리도 다름없이 지켰던 것이다. 그래서 의사로부터 간경화라는 말을 듣고서도 예전에 조심하라던 간염이 조금 나빠진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의사와 상담이 끝나고 “언데 시간이 나면 입원행서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막 문을 나서려는데 간호사가 거기까지 쫓아 나왔다. 그리고는 대뜸, ”그냥 가시려고요?“ 하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나 보려고 왔지 입원할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입원은 생각도 못하고 왔으니 집에 가서 준비 좀 해가지고 다시 올게요“ 하고 대답하고는 언제쯤 오는 게 좋겠느냐니까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큰 병도 아닌데 별스럽게 서두른다 싶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흘 뒤 입원 준비를 해서 병원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느긋하기 그지없다. 의사나 간호사에게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거나 생과 사를 초월한 도사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혈액 검사에 초음파 촬영, 조직 검사를 하는 데만 거의 열흘이 걸렸다. 그리고 그 열흘이 지난 다음날, 혈관 촬영을 하자고 했다. 허벅지 위쪽을 잘라 동맥을 따라 호스를 간까지 보내서 촬영도 하고 치로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의사가 그렇게 설명을 하니 그런 줄 알았지 그것이 간암 환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인 엔지오 그라프, 즉 혈관조형술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혈관조형술을 하고 난 뒤로는 가슴이 따끔거려 견릴 수가 없었고, 소화도 더 안 되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이런 촬영을 하자면 거절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왜 그런지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열흘 이상을 자리에 누워만 있기에는 회사 사정이 좋지 못하던 때였다, 그래서 혈관조형술을 받은 이틀 뒤, 병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움큼의 약만 받아들고는 퇴원을 해버렸다.
1개월이 지난 뒤, 그 동안의 경과도 보고 치료도 하려고 다시 입원을 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초음파와 혈액 검사를 마친 의사가 역시 예의 혈관 촬영을 해야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고생스러운지를 이미 겪어서 알뿐더러 다시는 이런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터였기에 어렵잖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그건 너무 아프고 하고 난 위에도 심한 고생을 했어요.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못 미더워서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의사는 버럭 화를냈다.
“아니 그러려면 뭣하러 입원은 하셨습니까?” 지금이야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만 당시로서는 왜 의사가 화를 내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이 간암 치료의 유일한 방법인데 환자가 그 치료를 거부하니 의사로서는 죽어가는 환자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판 아닌가. 그렇다고 환자에게 까놓고 당신이 간암이니 이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몇 개월 살지 못한다는 얘기도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의사는 그제야 조용히 아내를 불러 사실을 털어놓았던가보다. 크기가 5.5cm인 커다란 종양 하나와 작은 종양 두 개가 생긴 간암이라고, 이대로 두면 3개월에서 6개월을 못 넘기는데 혈괄조형술 이라도 하면 낫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노라고..... 의사를 만남 뒤에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 아내는 내게 혈관조형술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의사가 꼭 해야 하니까 저렇게 종용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화까지 내겠느냐면서.
내키지는 낳았지만 의사의 태도도 그렇고 아내도 권유를 해서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 병명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혈관조형술을 하러 들어간 방사선과에서였다. 마침 여의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주사 맞기 싫은 아이가 간호사에게
“주사 좀 살살 놔주세요.”라고 말하는 심정으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지난번에 이 치료를 받으니까 속이 따끔거리고 아주 아파서 고생을 했어요. 좀 안 아프게 하는 방법 없나요.?” 그저 농담 반에 진담 반이 섞인 말이었는데 의사는 별 사람 다 봤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선생님, 선생님 병이 뭔지 아세요.?” “그럼요. 간경화잖아요.”
대답을 듣고도 한동안 말이 없이 제 일을 하던 의사가 내쪽으로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약은요, 들어가서 닿기만 하면 정상 세포든 나쁜 세포든 다 죽이는 독한 약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이 약이 위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막기는 하지만 흘러나온 게 조금이라도 위로 들어가면 위세포를 죽여서 그렇게 따가운 거예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 하나 없이 아주 쉬운 말로 차근차근 해주는 설명이었지만 이해는 쉽게 되지 않았다. “간경화라면서 왜 세포를 다 죽이는 걸까?”
그제야 뭔가 직감적으로 짚이는 게 있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 나는 간경화가 아니로구나. 간암이었구나.”
다음날 아침 , 회진을 하러 들어온 담당 의사에게 대놓고 내 병이 암이 아니냐고 물었다. 의사는 그제야 난감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경화라고 했을 때는 치료만 하면 나을 것 같던 병이었는데 간암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죽음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삼남매인 아이들이 그때 큰아이는 대학교 4학년, 막내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아직 어렸다. 그 아이들을 다 키우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나오느니 눈물뿐이었다.
그때 집안의 누군가가 서울대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으니 거기서 검사도 다시 해보고 치료도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옷 하나를 사도 이집 저집 돌아보며 사는 게 기본인데, 비록 두어 번의 검사를 하기는 했지만 병원 한 곳의 말만 듣고 진득하게 치료를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해서 도의해버렸다. 병원을 옮기고 싶다는 말을 들은 의사는 그동안의 자료를 내주면서 다시는 안 볼 것같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자료를 넘겨받는 서울대병원의 의사는 “곧 보자”는 소리만 하고는 통 연락이 없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이제는 이쪽 병원도 저쪽 병원도 다닐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만 것이다.
병원 출입을 하기 전에도 나는 녹즙을 꾸준히 먹고 있었다. 피로 회복에도 좋고 간에도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아내가 야채를 구해 즙을 내주었다. 입원해 있으면서도 녹즙을 먹었는데 야채를 사러 갔던 아내가 그곳에서 만난 어떤 이에게 식이요법만으로 간장병 환자를 고치는 모임이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그곳이 바로 BRM연구소였다.
죽음의 장막은 걷히고
이젠 찾아갈 병원도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호회(BRM연구소)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91년 9월이다. 연구소에서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모두가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겠지만 무뚝뚝하기도 하고 권위적이기도 한 병원에서 죽을병에 걸린 환자로 침울해져 있었는데, 접수를 보는 사람이며 안내를 하는 사람이며 한결같이 친절하고 상냥하며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수요일의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병이 낫게 되는 원리와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하는데 귀에 쏙쏙 들어올 뿐 아니라 실천하기에도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그렇게 해서 나은 사람들이 많다니 나도 해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특히 병원에 따르면 그토록 구통스러운 혈관조형술이 유일한 치료방법인데 비해 먹는 것만 제대로 먹으면 나을 수 있다니 이보다 반가운 치료법이 어디 있을까.
기분 좋기는 박양호 실장과 만남도 마찬가지다. 내 증세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괜찮으니 걱정마라”고 하고, 내내 나을 수 있다는 용기를 복 돋아주며 그동안의 치료 사례들을 들려주는데 그렇게 마음 든든할 수 없었다.
박실장이 짜준 프로그램, 녹즙 재료와 보조식품에 대한 소개를 듣고 문을 나서면서 이미 반은 나은 사람처럼 여겨졌다. 신념이라는 게, 용기라는 게, 희망이라는 게 삶의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맑은 공기도 쐬고 직접 기른 신선한 야채로 녹즙을 해먹으며 치료를 하려는 생각으로 여동생이 사는 경북 봉화로 아내와 함께 내려갔다.
밭에서 야채를 뜯어 하루 세 번씩 꼭 녹즙을 마시고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식사도 엄격하게 지켰다. 바깥에 나갈 일이 있으면 먹거리를 빠뜨리지 않고 싸들고 다녔고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외식을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이때만 해도 녹즙기계가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때라 끼니때마다 일일이 찧고 빻아서 녹즙을 만들어준 아내의 수고가 지금 생각하면 눈물겹기조차 하다.
그곳에서 2개월을 보내고 올라왔다. 박실장의 말에 의하면 2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며 진행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지만 고려병원이나 서울대병원을 갈 처지가 못 되어
박실장의 소개로 송도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작은 종양 두 개는 이미 없어져버리고 5.5cm였던 큰 종양이 3,8cm로 줄어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허벅지를 뚫어 시술을 하고 끝나면 속이 아파서 고생을 하던 병원에서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일들이 불과 2개월 만에 이런 엄청난 변화를 보였으니 신바람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 2개월 뒤에는 3,8cm였던 것이 2,8cm로 줄었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기적이 정말 내게 나타난 것일까.
“오 하나님!” 하는 외침이 목구멍에까지 차올랐다.
사실 병을 앓으면서 더욱 굳건한 신앙심을 갖게 된 것도 변화된 내 생활 중의 하나였다.
예전에는 그저 이름만 고인이었지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게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내 병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믿을 곳이라고는, 기대어 위안을 받을 곳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지 않는가.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교인으로서 그 동안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새삼 뒤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구역의 성경공부 모임에, 온통 여자들뿐인 모임에 늙수그레 하고 유일한 남자인 내가 끼어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처음 성경을 읽고 배우던 시절의 마음으로 성경공부도 했다.
예전 같으면 “창피하게 그런 데를 어떻게..... 라고 도리질을 했을 테지만 그때 내 상황은 그렇게 절박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이런 기적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종양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을 들으니까 정말 그런가 싶기도 했다. 아니 없어졌든 작아졌든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시리어서 내가 암을 앓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다른 큰 병원을 통행 더욱 확실한 진단을 받고 싶었졌다. 이제 아무리 엄청난 소리를 들어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나는 면역요법의 효용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한양대학병원이다. “악성종양입니다. 2cm 남짓 되는 게 하나 있는데 치료를 해봅시다”전후 사정은 까많게 모르는 의사는 암이라며 서두르자고 했다. 치료란 게 역시 혈관조형색전술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양이 없어졌다니까 다른 병원에서는 내가 암을 앓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으로 기대하고 갔었다. 그런데 암이라고 애기를 하고 또 종양이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입원해 생각하기도 싫은 혈관조형술의 고통을 받는다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확실한 건 종양의 크기가 작아져 있다는 것 아닌가.
연구소 박실장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하니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면서 “조형술 치료를 하실려구요?” 하고 물었다. 안할 줄 뻔히 알기에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구요. 아마 그것들은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암세포들일 거예요. 연필로 쓴 글씨도 지우면 자국이 남는데 말라붙은 암세포 자국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도 곧 없어질 거구요”라고 했다. 아마 그런 위안의 말을 들으려고 박실장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이후 더욱 철저히 식사를 챙기고 녹즙이며 보조식품을 먹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지막 박차를 가하면 암 세포의 흔적조차도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혹시 이쯤이면 다 떨어져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집에서 멀지 않은 영등포에 위치한 방사선만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찾아갔다. 역시 내 병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건강 합니다” 검사 결과를 보러 간 날, 머리가 허연 노 의사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단번에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한양대병원에서 나타났던 암 세포들까지도 완전히 사르라들고 말았다는 것 아닌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겪어온 투병생활에 대해 애기를 꺼냈다.
의사의 눈빛이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는 듯이 달라지더니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의사들을 따로 불러 모아 한참 회의를 하더니 다시 나왔다. 그리고 검사한 사진을 짚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사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아 몰랐지만 암환자였다면 아마 2~3cm 되는 이 부위가 암세포였던 것 같군요. 하지만 이게 암세포였다면 당신은 이미 죽었거나 오늘 내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참 대단하십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소리였는지 모른다. 새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부터는 더 이상 투병이 아니라 다시 찾은 건강을 지켜내야 할 때다.
그 후로도 지금껏 여전히 잡곡밥에 된장국은 식단의 기본이다. 야채도 많이 먹고 특히 마늘은 끼니마다 반 통 이상을 혼자서 먹는다. 녹즙을 달고 사는 것도 여전하다. 하루 세 번씩 먹던 것을 요즘은 두 번으로 줄였지만 지방에 갈 일이 있을 때도 아예 녹즙기를 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며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채소며 과일로 즙을 내먹을 정도다. 또 효모며 균사체도 수시로 먹는다. 건강할 때 63kg이던 몸무게가 병원생활을 하는 며칠 동안 8~9kg이 빠지더니 면역요법과 더불어 이내 62kg으로 돌아온 후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은 후 집안에서는 모두들 내가 죽는다고 했다. 죽기 전에 딸자식 하나라도 여의는 걸 봐야 하니 큰딸을 빨리 시집보내자는 말이 있었던가 보다. 겨우 대학 4학년이던 아이를 학교도 중단시키고 그해 12월에 부랴부랴 등 떼밀 듯이 결혼시켰으니 지금도 그 아이만 보면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일도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쓴웃음만 나온다.
방사선과 검사를 받은 뒤 한동안 병원을 잊고 있다가 녹십자병원에서 또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병을 않고 4년쯤 지난 95년이었는데 거시서는 더욱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항체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어 있던 비장도 많이 가라앉아 거의 정상 수준을 되찾았다. 이쯤 되면 간암의 공포로부터는 완전히 해방이 된 것이고, 지금은 오랜 시간이 걸려야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간경화 기운만 조금 남아 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돌아 보건데 간경화 판정을 받을 때만 해고 전혀 병색이 없었던 내가 간암 판정을 받은 순간부터 얼굴이 노래지고 곧 검어졌다. 그건 바로 마음이 병을 키운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체의 어는 부위에 암이 걸린 사실이 무서운 게 아니라 마음에 암이 걸리면 그건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하지 못한다.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데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몸속의 암이 마음으로 전이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속의 병은 저절로 낫는다.
지금도 죽을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길고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는 환자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내 조언이다.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경험했던 여러 가지를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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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일요스페셜 당시 섭외 요청을 받고 출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었다.나 자신도 자신이지만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암 투병생활 동안 옆에서 병간호 하며 지내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방송출현으로 세상에 알려 다시 가족들에게 부담스런 주위의 시선을 느끼게 하여 주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여러 날을 고민 하던 중 가끔씩 암 환자분들에게 내가 암과 싸우면서 해보던 식사방법, 운동, 식이요법 등을 상담해주던 한분의 전화를 받았다.
너무 환한 목소리로 대뜸 “감사합니다.” 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묻자 그동안 알려주신 방법대로 열심히 하였더니 병원에서 너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 전화 통화를 했을 때 지치고 아파하던 음성이 떠오른다. 그 도 나 처럼 힘든 시간들을 견디어 내고 있을텐데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더 많은 방법들을 알고 싶다며 식사약속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을 인사를 받고 전화를 내려놓고 나니 내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나에 경험담이 여러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자신도 타인의 도움으로 병을 완치했는데 그레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가끔씩 일요스페셜 당시 병원에서 검사했던 나에 기록들 보면서 술한잔 하고 싶은 생각들을 다시 다잡는다. 암은 없어졌지만 다시 찾은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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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회” 라는 암환자 모임을 나가면서 나처럼 완치하신 분들 과 현재 병과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여러 가지 것 들을 공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공포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지만 병원치료만으로 정신적 위안을 받고 투병의지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간병에 지쳐 암환자의 정신적 치료란 생각조차 못하기 마련이다.
“밀알회”에서 서로 만나 암을 완치하신 분들이 현재 암과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고 의지하고 서로 용기를 준다. 한 달에 한번 씩 만나 이야기 하고 새로 오신 분들은 전화번호를 주고받아 통화하면서 암을 치유해가는 과정들을 조언해준다. 어떤 날은 전화가 너무 많아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일 년에 2번 “야유회”를 간다. 가볍게 산행도 하고 좋은 음식도 먹고 산과 들에 맑은 공기를 마시면 몸도 가볍고 기분도 좋아진다.
면역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방법으로 저 강도 운동이 좋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면역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방법이다. 겨울철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맨손체조로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면역력을 유지하는 것도 영향섭취와 관련이 있으므로 맨손체조는 식후에 하는 것이 좋다.
매일 맨손체조를 하되 시간을 정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됨으로 생각날 때 마다.
10~20분만 하면 된다. 현재는 친구들과 산행도 5시간 6시간 산행을 한다.
처음 이제 막 걸음을 때는 아이처럼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친구들과 산행하는 것이 나에게 큰 행복이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병과 싸워 이기 고자 한다면 운동은 꼭 권한다.
가족이라는 의미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특별하다.
특히 “나에 반쪽 고 여사” 나 자신 보다 더 아프고 힘들었을 시간들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용기를 주던 사람 젊었을때는 술 때문에 마음 고생시키고 나이가 더 먹어서는 병 때문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문득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두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조용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서 눈물을 닦아낸다.
“사랑해” 아니 “죽도록 사랑해” 이 말이 참.... 마음에만 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주름도 많이 늘었지만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고” ,“감사하고” “미안하다”
고생한 시간들을 아니 더 많은 시간들을 아내를 위해 살아가려한다. 이제는 아내가 내게 기대어 내 품안서 “행복하고” “평온하고” 나를 믿고 의지하며 남은 인생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