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전설의 야구투수 최동원씨가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이후 대장암과 육식을 연결 짓는 관련기사가 쏟아졌다. 특이한 점은 최 선수는 대장암의 주요 원인이라고 알려진 육식, 흡연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최 선수의 대학 선배인 대한암예방학회 함기백 교수(가천의대 길병원 소화기내과)는 “내가 본 최 선수는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고 고기는 즐기지 않았다. 식이와 생활이 절제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했다.
비단 최 선수뿐만 아니다. 함 교수는 “채식을 하는 스님이 대장암에 걸렸다는 보고도 있다”고 말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육식과 흡연, 음주를 일삼지만 60~70세가 넘도록 대장이 깨끗한 사람이 있다. 옛말에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속담이 있다. 음식이 질병을 좌우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질까.
그 답은 유전자에서 찾을 수 있다. 함기백 교수는 “부모 양쪽 조상에게 물려받은 암 유전자가 얼마나 발현돼 있느냐에 따라 암 발생이 늦어지기도, 빨라지지도 한다”고 말했다.
함 교수는 암에 관련해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암에 걸릴 위험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다. 우리 몸에서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약 150여 개다. 100개는 암 유발과 관련된 유전자, 나머지 50여 개는 암 억제 기능이 있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는 한 쌍의 염색체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어머니 쪽, 하나는 아버지 쪽에서 받는다. 만약 조상 양쪽에서 각각 암 유발 염색체를 받았다면 암에 걸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암 유발 유전자는 마주보는 한 쌍의 염색체가 모두 발현돼야 세포변성을 시작하는데, 부모 모두 암 유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암 발생의 최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둘째는 암에 걸릴 수도, 안 걸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예컨대 부모 중 한쪽에서만 암 유발 유전자를 받는 경우다. 암 유발 유전자를 이루는 한 쌍의 염색체가 모두 발현돼야 암이 생긴다. 이들은 한쪽 염색체만 발현돼 있다.
염색체가 발현되도록 ‘촉매’역할을 하는 술·담배·고지방식·화학물질(인스턴트·가공식품 등에 많이 든 인공 합성 물질)을 많이 섭취하면 나머지 한 염색체가 변형돼 그때부터 암세포가 생기기 시작한다.
셋째는 암에 걸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이다. 부모 중 누구에게도 암 유발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 암에 관련된 유전자를 이루는 양 염색체가 아무것도 발현돼 있지 않으므로 암이 생기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쁜 식사습관으로 유전자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야 한쪽이 변성되고, 또다시 공격해야 나머지 한쪽이 변성돼 비로소 암세포가 생긴다.
이 같은 유전자 차이 때문에 같은 식습관을 가져도 누구는 암이 생기고, 누구는 암이 안 생기는 것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서울대병원 암연구소 송용상 교수는 “예전엔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 다만 ‘가족력’, 또는 ‘체질’이라는 차이로 설명했다. 최근 10년 사이 게놈지도(인간의 유전자를 모두 밝혀낸 지도)가 발표되고, 유전자 연구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암 발생이 유전자에 따라 다른 속도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떤 유전자를 갖든 염색체를 공격하는 나쁜 식습관이 있으면 결국 누구나 암에 걸린다는 사실이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송용상 교수는 “암 유발 유전자가 있다 해도 그것이 조금씩 변형돼 실제 ‘암’으로 나타나는데 걸리는 시간이 통상 20년쯤이다. 만약 양쪽 부모에게 모두 암 유발 유전자를 받은 사람이라도 암 억제 유전자가 더 잘 발현되도록 철저한 식사요법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암이 나타나는 시기를 훨씬 늦출 수 도 있다”고 말했다. 보통 양가에 암 가족력이 있는 사람은 일반적인 식생활습관을 유지하면 40~50대에 암이 나타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철저한 식사요법을 하면 발현시기를 60~70대 이상으로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20~30대부터 정기검진을 해 암을 조기에 발견, 제거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다. 함 교수는 “최 선수는 암 유전자 발현이 예정돼 있었던 경우일 것”이라며 “20대 때부터 철저하게 좋은 식습관을 유지하고, 정기검진을 했으면 암 발병을 늦추거나 조기에 암을 발견해 제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쪽 모두 가계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함 교수는 “이런 사람들은 음식을 고루 챙겨 먹는 것만으로도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단, 고지방식사·음주·흡연을 과도하게 지속하면 건강한 유전자의 방어벽도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내 몸에 암 유발 유전자가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양쪽 부모 3대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암 환자가 있었나 살펴본다. 같은 항렬인 친척까지도 살펴본다. 암 환자가 1명씩 늘어날 때마다 암 발생 위험은 몇 배로 높아진다.
최근에는 암 유전정보를 직접 파악해 볼 수 있는 검사법도 등장했다. 피를 뽑아서 유전정보를 확인해보면 일부 암은 조기 예측할 수 있다. 현재 몇 개 대학병원에서 일부 환자에 대해 유방암·대장암·위암 등에 대한 암 유전자분석을 하고 있지만 아직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함 교수는 “암 유전정보를 완전히 파악하는 걸 100으로 치면 현재 70%까지 파악한 수준이다. 암 유발 유전자를 제어하는 영양성분에 대한 연구(유전영양학)도 꽤 진행됐다. 이런 속도라면 10년 후에는 자신의 암 유전자 지도에 따라 미리 영양 처방을 받고, 치료가 아닌 예방이 중심이 된 암 관리가 대중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지영 기자